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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 Yeosu

Korean
1995

우리 시대 가장 젊은 고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스물일곱번째―한강의 『여수의 사랑』

소설이 오랜 소통의 장(場)이 되기를 꿈꾸는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그 스물일곱번째 주자는 등단 19년 차를 맞는 한강의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이다. 그간 다섯 편의 장편소설과 두 편의 소설집을 펴낸 중견 작가 한강은 이 책을 다시 내면서 이십대 “아무도 모르게 숨겨둔 사적인 경험”을 돌아보자, 되살아나는 기억이 “종내에는 숨 막히도록 생생하게 가까워오는 것을 느”껴 여러 번 쉬어가야 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여수의 사랑』은 1995년 출간 당시 초판 해설에서 김병익이 “그녀는 왜 삶의 치욕들을 헤집어, 그들의 고통스런 운명을 잔인하게, 우리 앞에 던져주는가?”라고 말했듯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버리고 지운 기억을 되살리는 지난한 시간을 겪게 한다. 안간힘으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왔지만, 돌아보면 그 시간들은 ‘인간’이라는 상처를 안고 살아온 아픈 시간을 깨우는 뼈아픈 각성의 시간이다. 내가 버린 나의 스무 살을 들추는 일이 그리 달가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가난했던, 막막했던 그때의 기억은 힘든 시간을 견뎌낸 ‘나’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자가 동력을 가동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여수의 사랑』이 다시 태어난 이유이다.
그래도 다시, 한강을 읽는 이유!

한강의 소설을 잡는 손길은 어쩐지 조심스럽고 어쩐지 시작부터 아슴아슴 통증을 일으킨다. 한강이 자신의 작품에서 그리려고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회 현실적 인과보다는 존재의 피로감, 희망 없음이 주는 좌절감 같은 근원적인 정서적 상황이다. 세태 묘사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인간의 지울 수 없는 운명적 슬픔, 삶의 비애적 서정, 세계에 대한 비극적 전망을 소설 속에 새겨 넣는다. 작가가 이토록 외로운 삶을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 것은 그의 상상력의 뿌리가 존재의 우수에 박혀 있음을 증거한다. 한강의 인물들은 떠나고, 버리고, 방황하고, 추락하고, 죽음 가까이에서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그리워한다. 그러면서 존재의 ‘살아 있음’을 일깨운다. 그러나 그렇게 매순간 ‘깨어 있기’란 얼마나 어려운 수도의 길인가. 한강이 그려내는 삶의 외로움과 고단함이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녀는 비속한 일상의 결핍을 안고 있고 그래서 생활 속 좌절들로 희망을 찾지 못하지만, 세속적 희망 대신 삶의 근원성으로의 외로움과 고단함, 운명과 죽음에 대한 어두운 갈망 그 속에서 그것들과의 친화감을 키워낸다. 그녀가 껴안는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과 외로움의 자리는 우리가 어떤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를 잃어가며 바쁘게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끈덕지게 사로잡고 있어 “한밤중의 투명한 자의식 속에서처럼, 새록새록 자라나(김병익)”니, 우리는 전율할 것이다.

“어디로 가든, 그곳으로 가는” 여수행 기차에 몸을 싣고

햇볕 쨍한, 봄날. 여수 앞바다를 떠올리는 건 어쩐지 짓궂은 느낌이다. 여수는 어두운 운명적 우수를 드리운 한강의 인물들과 어울리기 때문이다. 여수발 기차에 실려와 서울역에 버려진 자흔과 아내를 잃은 아버지가 자신과 동생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시도했던 정선(「여수의 사랑」), 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인규(「질주」), 식물인간이 된 쌍둥이 동생의 삶까지 살아내야 하는 동걸(「야간열차」), 백치 같은 여동생을 버리고 고향에서 도망친 정환(「진달래 능선」) 그리고 집과 고향을 버리고 고아처럼 떠돌며 자신을 찾으려 애쓰는 영진과 인숙(「어둠의 사육제」). 여수는 어딘가 상처 입고 병든 이들이 마침내 이를 서러운 마음의 이름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기쁨에 젖어 외쳐댈 수 있는 환한 마음가짐이기도 하지만 끝내는 이룰 수 없음을 너무나 분명히 알기 때문에 간절한 소망으로 새기는 어두운 느낌이기도 하다. 한강은 어떤 여수의, 어떤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여수는 「여수의 사랑」에서 자흔이 태어난 곳일지도 모르며 정선이 버리고 떠나온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짧은 생애임에도 한없이 떠돌며 살아온 사람의 피곤한 ‘여수’가 역력한 자흔이나, 스스로가 버렸다기보다는 그곳에서 쫓겨나 서울에서 힘들게 살아온 정선이 다시 가고 싶지 않았지만 끝내는 향하지 않을 수 없는 궁극의 지점이다. “그들은 정말 여수를 사랑하는가? 사랑한다, 분명히. 그곳이 그들의 고향이고, 그곳에서야말로 친숙하고 따뜻하고, 외롭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흔이 “어디로 가든, 난 그곳으로 가는 거”라고 말하고 떠나고, 정선도 밤기차를 타고 자기에게 멍울을 지워준 여수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정선과 자흔에게 여수에 대한 사랑은 두려움과 아픔을 점지하는 곳이기에, 지치고 외로운 영혼이 속으로만 안타깝게 부르는 마음의 자리가 아닐 수 없다. 이른 봄의 여수는 혹독하게 후려치는 바람과,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 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 빗발들이 우리를 맞이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우리는 어쩌면 사람과 가장 닮은 바다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판 작가의 말 중에서

문장에 대한 고심보다 어렵게 느껴진 것은 기억들이었다. 한 편씩 읽어가는 동안 그 시절의 공기, 내 몸과 마음의 상태 같은 것들이 차츰 생생하게, 종내에는 숨 막히도록 강렬하게 가까워오는 것을 느꼈다. 이를테면 「어둠의 사육제」는 새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교정을 보는 것인데도 힘에 부쳐 여러 번 쉬었다. 이 소설을 쓴 것은 기록적으로 무더웠던 1994년 여름이었는데, 석 달 가까이 ‘명환’을 죽이지 않아보려고 소설을 붙들고 있었다. 마지막 밤의 ‘영진’처럼 때로 몸이 떨리고 뜨거운 눈물이 솟았던 캄캄한 시간들이 아직 원체험처럼 남아 있다. 그 밖의 다른 소설들을 읽을 때에도, 아무도 모르게 그 속에 숨겨둔 사적인 경험들이 고스란히 다시 떠올랐다. 한 사람―이 소설들을 쓰던 나―에게 이상한 방식으로 뒤늦은 인사를 건네는 기분이었다. 낯설고도 친숙한 그 사람, 가까스로 그렇게 태어나고 있던 그 사람과, 불가능한 굳은 악수를 나누고 싶었다.

신판 해설 중에서

『여수의 사랑』이 시간의 풍화작용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튼튼히 살아남을 것임을 확신하는 까닭은 삶의 대립쌍이 죽음이고, 죽음 곁에 있는 삶이란 사랑의 상실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짐 지는 일이며, 상처는 죽음을 동반하는 ‘되태어나기’를 강요하기에 가장 두려운 적이자 장애물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되삶’의 가치란 인간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심원하고 도저한 정신의 층위에서 성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젊은 ‘고전(古典)’이다. _강계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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